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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인 여행...866.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 유적지.

공룡우표매니아 2023. 12. 13. 03:00

관 광 인  여 행................................... 866.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 유적지.

    정약용은 조선후기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762년(영조 38)에 태어나 1836년(헌종 2)에 사망했다. 남인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개혁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정조 재위기에는 관료로 봉사하면서 과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 시기에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장기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중에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직접 확인하면서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을 포괄하는 거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양주 : 정약용(丁若鏞) 유적지

    정약용의 생애는 대략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단계는, 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유배 이후 다시 향리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정약용의 생애에서 마지막 단계는,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이 시기에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尙書)』 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 · 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 그는 또한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학 운동의 목적에서 외현손 김성진이 편집하고 정인보·안재홍이 교열에 참가하여 1934 ~1938년에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154권 76책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도 있다.

남양주 : 정약용(丁若鏞) 유적지

    정약용은 18세기를 전후하여 우리나라 사회에서 강력히 제시되고 있던 개혁의 의지를 집대성했고, 개혁의 당위성을 명백히 해주었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에게는 개혁을 향한 열정과 함께,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민에 대한 애정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시대의 문제점을 밝혀내는 데 과감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고뇌하던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상적인 왕도정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스스로 좌절하지 않고 그 방대한 개혁사상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그의 개혁안이 묵살되거나 좌절되어가는 과정에서 조선왕조의 몰락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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