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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초일커버(FDC)

공룡우표매니아 2019. 4. 23. 04:00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초일커버(FDC)


우표발행일 : 2019. 4.  11     우표번호 : 3367.    인쇄 및 색수 : 평판 / 5도 / 금박

디자인 :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사진과 대한민국 임시헌장

디자이너 : 박은경  용지 : 평판원지 : 인쇄처 : 한국우편사업진흥원(POSA. Southern Colour Print)

  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입니다. 우정사업본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우리가 지켜온 지난 100년을 기억하고, 현재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펼쳐질 100년이 희망 가득한 미래로 이어지길 바라며 기념우표를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신년축하회기념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성립, 임시헌장선포문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불같이 일어난 3·1운동은 나라 안팎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와 독립운동가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조국 독립을 반드시 이루고자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3.1운동 직후인 4월 11일, 곳곳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 29인은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모여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로 삼권 분립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제 정부였으며, 대통령중심제를 지도체제로 채택했습니다.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선출됐으며,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에는 대한국민회의를 이끌었던 이동휘, 외무총장에 김규식, 내무총장에 안창호, 법무총장에 신규식 등을 선출해 정부의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27년간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서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라고 밝혀 두었습니다. 그만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우리 민족사의 큰 전환점으로서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이념적 정부로 독립운동의 통합을 시도했고, 8·15 광복까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펼친 유일한 기구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숭고한 가치는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수립했던 임시정부. 정부수립일은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란 정식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정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국내외에서 3·1운동이 전민족운동으로 확산될 때, 독립정신을 집약하여 우리 민족이 주권국민이라는 뜻을 표현하고, 독립운동을 능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하였다. 그 뒤 1945년 8·15광복까지 27년 동안 상하이[上海]를 비롯한 중국 각처에서 한국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그런데 정부라고 하면 국제법상 통치권이 미치는 국토와 국민이 있어야 하는데, 통치권을 행사할 대상이 없었으므로 일반 정부와는 성격이 달랐다.

  그리고 망명정부도 아니었다. 대한제국과 시간적 연속성이 없고 주체세력이 다르고 이념이 달랐으므로 망명정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전민족운동이었던 3·1운동에 의해 수립된 임시정부였으므로 전민족의 의지와 이념적 기반 위에 설립된 정부적 조직임에는 틀림없었다. 따라서, 국제적으로는 주권국민의 대표기관(정부)으로서, 또 대내적으로는 독립운동의 통할기구로서의 구실을 가지고 탄생하였다.

연원 및 변천

  3·1운동을 전후로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상하이를 거점으로 1919년 9월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되었다. 상하이에 있던 시기(1919∼1932)에는 국내외동포사회에 통할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 통할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초기의 독립전쟁은 만주와 연해주(沿海州)의 독립군단체에 일임하고, 연통부와 교통국 등 비밀조직의 운영과 외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베르사이유 강화체제에 의한 국제적 안정기조를 고집하는 열강의 냉대와 일제의 추격에 의한 국내조직의 파괴, 그리고 상하이·만주·연해주·하와이 등 해외 각처에 산재한 동포사회 사이의 교통·통신의 장벽과 당해국가인 중국·소련·미국 등의 방해 또는 방관적 비협조로 애초의 계획대로 독립운동을 계속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 위에 헌정을 기초로 한 민주공화정부 체제였으나, 운영 기술이 미숙하여 국민적 지지기반이 붕괴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독립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기반을 회복하는 어떤 방도를 찾아야만 하였다.

  그래서 정부 외곽에서는 공론(公論) 수합을 위해 국민대표회(1923)가 소집되었고, 두 차례에 걸쳐 헌법개정을 단행하였으며(1925·1927), 민족유일당촉성운동(1927) 등을 추진하였지만, 침체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의거로 활로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반격으로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고, 뒤이어 일어난 중일전쟁(1937)으로 중국 각처를 옮겨 다녀야 하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상하이[上海, 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綦江, 1939]·충칭[重慶, 1940] 등지를 차례로 이동하며 기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939년 치장으로 옮긴 뒤부터는 전시체제로 정비함으로써 정상적 운영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뒤 곧 충칭으로 옮겼는데, 그 곳에 있는 동안(1940∼1945)에는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성과는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여, 때마침 일어난 태평양전쟁에 임하여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발하고 연합군과 함께 중국·인도·버마 전선에 참전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주로 중국정부를 통로로 국제외교도 강화하여 카이로선언(1943)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약속도 받았다.

  그리하여 건국강령(建國綱領)을 발표(1941)하고 헌법을 개정(1940·1944)하면서 광복 한국의 새로운 통치기반을 다져나갔다. 이와 같이 한때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27년 동안 전개한 활동과 그간의 세계사를 고려하면 영고성쇠의 과정은 당연하게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인의 이념적 정부로 독립운동의 통할을 시도하였다는 점, 실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8·15광복까지 단절되지 않고 존재한 유일한 기구였다는 점, 또 국제적으로 한국인의 독립의지가 감상이 아닌 현실적인 요구라는 것을 보여준 실체로서 존재하였다는 점 등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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