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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인 여행.... 4. 파주 의 율곡 이이와 화석정(栗谷 李珥 花石亭)

공룡우표매니아 2018. 8. 21. 04:00

관광인 여행.... 4.

파주의 율곡 이이와 화석정(栗谷  李珥  花石亭)



사용개시일 : 2018. 4. 25  디자인명 : 율곡 이이와 화석정   디자이너 : 신재용  사용우체국 : 법원리우체국

법원리 : 율곡 이이와 화석정(栗谷  李珥  花石亭)

  율곡 이이는 1536(중종 31)∼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으로,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명종 3)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1555년 20세 때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1557년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1558년 봄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문과 초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이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서인(西人)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법원리 : 율곡 이이와 화석정(栗谷  李珥  花石亭)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이며 임진8경중 제1경인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의 유학자인 길재(吉再)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사후 그를 추모하여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폐허가 되었다가 율곡 이이의 5대조인 강평공 이명신(康平公 李明晨)이 세종 25년(1443년)에 정자를 세우고 1478년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였다.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으며, 이이 때에 이르러 다시 중수된 유서깊은 곳이다. 율곡 선생은 평소 정자에 제자들과 함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들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먹여 두었다고 하는데, 훗날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당시(4월 29일 밤) 억수같은 폭포속에서 강을 건널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무사히 배가 강을 건넜다고 전한다. 율곡선생은 국사의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 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법원리 : 율곡 이이와 화석정(栗谷  李珥  花石亭)

  본관은 덕수로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일곱남매중 셋째아들로 중종31년(1536)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 황혼헌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80여 년 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에 후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초익공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른 건물이다. 화석정은 풍광좋은 임진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임진왜란때에 선조 임금의 피난길을 몸을 태워서 환하게 밝혀주었다고 한다.  (cafe.daum.net/2011.07.18/QyLN/424   백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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