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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소리(국악인) 초일커버 (FDC)

공룡우표매니아 2018. 5. 5. 04:00

한국의 소리(국악인)  초일커버 (FDC)


발행일 : 2018. 4. 30. 우표번호 : 3275 ~ 3277. 디자인 : 해금(김천흥). 거문고(신쾌동). 가야금(김윤덕)

   디자이너 : 김소정    인쇄처 : 한국우편사업진흥원(Royaljoh, Enschede)


  우정사업본부는 우리나라 전통 음악의 아름다움을 재조명하고 국악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자 국악계의 국가 무형 문화재 예능 보유자 3명을 소개하는 우표 한국의 소리(국악인) 를 발행합니다.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전통 무용가이자 해금 연주가인 김천흥은 국가 무형 문화재 제1호 종묘 제례악(해금과 일무)과 제39호 처용무의 예능 보유자이다. 14세에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2기생으로 입학했으며, 1923년 순종 황제의 50세 생신 축하연에 무동으로 참가하며 조선의 마지막 무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해금 연주에 재능이 뛰어났으며 양금 연주와 가곡, 정악과 속악, 정재와 민속무를 아우르는 전통 무악(舞樂)의 산증인으로서, 평생을 전통 무악의 보존과 재현에 힘썼습니다.

 신쾌동(申快童  1910~1977) 

  거문고 산조의 대가로 불리는 신쾌동은 국가 무형 문화재 제16호 거문고 산조의 예능 보유자다. 거문고 산조의 창시자 백낙준에게서 거문고 산조를 배웠으며, 여기에 중중모리장단과 휘모리장단을 새로 짜 넣고 중중 모리장단을 확대하는 등 거문고 산조의 틀을 잡았다. 또한 당대 명창들에게 배운 솜씨로 독창적인 거문고 병창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성악연구회를 비롯해 국립국악원, 국악예술학교, 서라벌예술대학 등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등 평생을 거문고 산조와 함께했다. 후진양성과 창극운동에 앞장섰다. 1958년 대한국악원 이사, 전주 국악원장을 지냈다.

 김윤덕(金允德  1918~1978)

  가야금 산조의 명인 김윤덕은 국가 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의 예능 보유자다. 어린 시절 가야금, 양금, 거문고의 풍류를 익혔으며, 음악적 재질이 뛰어나 스승의 산조에 새로운 가락을 짜 넣은 자신만의 가야금 산조와 거문고 산조를 만들었다. 김윤덕은 명인들과 함께 미국 카네기홀 공연을 비롯한 해외 공연을 다니면서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문화 사절단 역할을 했다. 또한 후배 양성에 힘씀으로써 근대 국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 가야금구음정악보.·현금산조보.·현금정악보.·가야금풍류국문신보.·가야금정악보 등의 악보가 있다.



 김천흥(金千興,  1909〜2007) 

    한국 전통음악 및 궁중무용의 명인. 조선의 마지막 무동이기도 하다. 14세에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로 들어가 해금을 비롯한 아쟁, 양금을 배웠고 15세에 순종황제 탄신 51주년 잔치에서 무동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1968년 종묘제례악 중 일무로 중요무형문화제 제1호, 1971년 처용무로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후배양성과 중요무형문화재의 올바른 전수를 위해 힘쓰며 한국무용 및 전통음악과 관련된 저서를 남겨 국악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다음백과사전)

신쾌동(申快童  1910~1977)  

  거문고의 명인이다. 전라북도 익산에서 출생하였고, 호는 금헌(琴軒)이다. 어려서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정일동에게서 거문고 정악(正樂), 백낙준(白樂俊)에게서 거문고 산조를 익혀 백낙준의 고제(高弟)가 되고 그가 죽은 후 스승의 의발을 이어 거문고 산조의 제1인자가 되었다. 1938년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명창 송만갑, 정정렬에게 창악을 배워 거문고와의 병창을 개발하니 거문고 병창은 그가 효시가 되었다. 그리고 백낙준의 거문고 산조는 진양조, 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밖에는 없던 것을 여기 중중모리와 휘모리를 더해서 거문고 산조의 틀을 완성시켰다.  ( 위키백과 )

 김윤덕(金允德  1918~1978)

   가야금 산조와 거문고 산조의 명인이다. 전라북도 정읍에서 출생하였고, 호는 녹야(鹿野), 본관은 광산이다.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와 거문고 산조를 만들었다. 1931년 정자선(鄭慈善)에게 양금을, 1932년 김광석(金光錫)에게 풍류가야금을, 김용근(金容根)에게 풍류거문고를 배워 지방 풍류를 두루 익혔다. 1947년 정남희에게 가야금 산조를 배웠고, 1948년 한갑득에게 거문고 산조를 배웠다. 또한 대한국악원국극사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가야금과 거문고를 가르치기도 했다. 1953년부터는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1960년부터는 서울대학교와 국악예술학교 강사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과 연주 활동에 전념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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