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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인 여행 ..... 638. 충남 공주 무령왕릉과 석수. 부여 낙화암

공룡우표매니아 2022. 8. 1. 03:00

관광인 여행 ............................ 638.  

충남 공주 무령왕릉과 석수(武寧王陵石獸). 부여 낙화암(落花巖).

 

공주. 무령왕릉과 석수(武寧王陵石獸).

공주 : 무령왕릉 과 석수(武寧王陵石獸)

   국보 제162호. 높이 31.5㎝, 길이 48.5㎝.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의 연도(羨道) 중앙에 놓여 있었다. 진묘수(鎭墓獸)의 하나로 짐작되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되었다. 신앙적 성격을 띤 상상의 동물로서, 형태가 특이하다. 머리에는 쇠로 만든 뿔이 하나 있고 몸뚱이 양측면에는 불꽃 같은 날개가 표현되어 있다. 주둥이를 붉게 칠한 것을 비롯하여 온몸을 채색한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거의 퇴색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뒷발 하나는 돌에 결이 난 부분에서 갈라져 떨어져 나갔으며, 머리에 꽂은 뿔은 부식이 심하였기 때문에 출토 후 뿌리에서 잘려나가고 말았다. 각섬석질(角閃石質)의 돌로 제작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여. 낙화암(落花巖).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글씨이다.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벽에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더 잘 보인다. (낙화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대한민국 구석구석)

부여 : 낙화암(落花巖)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은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성왕이 국가 중흥의 원대한 꿈을 펼치려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으나, 위덕왕ㆍ무왕ㆍ의자왕에 이르는 동안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단독으로 백제에 대항하기가 어려워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백제는 국운을 다했던지 의자왕도 정사를 소홀히 하고, 나라가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의자왕 20년(660) 사비성은 신라ㆍ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성내에 살던 궁녀와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침략군이 부소산성까지 몰려들자, 백제 여인들은 적군에게 잡혀가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보다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는 길을 택했다. 이처럼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고, 백제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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