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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인 여행 ...... 635.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 과 영릉

공룡우표매니아 2022. 7. 26. 03:00

관광인 여행 ....................... 635.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 과 영릉

 

세종(世宗)

   조선 제4대 왕이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왕.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된 후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여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이 되는 전반적인 제도를 갖추었고, 조선왕조가 지배 기반으로 삼은 유교문화를 융성하게 했다. 특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백성들이 쉽게 쓰고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농사에 도움이 되는 천문기구를 개발하고 도량형을 정비했고, 출판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대외적으로 여진과 왜를 정벌하고 명의 요구를 적절히 조율했다. (다음백과)

능서 : 세종대왕과 영릉

   세종은 1397년(태조 6)에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이다. 위로는 14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폐위된 양녕대군과 세종의 세자 책봉 후 불가에 귀의한 효령대군이 있으며, 아래로 성령대군이 있다. 세종은 1418년(태종 18) 6월에 양녕대군을 대신해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두 달 뒤 태종의 선위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너무 좋아해서 부왕인 태종이 건강을 염려해 책 읽기를 금할 정도였다. 남달리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세종은 자신의 넓고 깊은 학식을 국가 경영에 직접 도입해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세종의 시대에 조선은 부국강병을 이루어 안팎으로 안정된 정국 속에서 한글 창제, 예치주의의 실천, 천문학 및 농업의 발달 등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조선국왕전)

   세종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 기반 위에 세종을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 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능서 : 세종대왕과 영릉

   여주영릉(驪州寧陵) : 영릉은 조선 왕릉 중에서도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영릉 덕분에 조선 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이런 명성을 갖고 있는 영릉은 제4대 세종(1397~1450)과 소헌왕후(1395~1446) 심 씨의 합장릉이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08년 충녕군에 봉해졌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맏아들 양녕대군이었는데 그는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라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과 딱딱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러한 그의 품행은 태종의 눈에도 벗어나 결국 1418년 충녕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보통 왕은 왕위를 물려받을 때 선왕이 죽은 뒤 닷새째 되는 날 입관을 마치고 다음 날 즉위한다. 하지만 세종은 선왕이 살아 있을 때 왕위를 물려받았다. 태종 18년(1418), 태종은 경복궁 보평전에서 대성통곡하며 만류하는 신하들의 간청을 뿌리치며 세종에게 옥새를 주고 왕의 자리에 앉힌다.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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