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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장군

공룡우표매니아 2018. 6. 16. 04:00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장군


  북한의 김일성은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통일안을 확정시키는 한편, 이러한 침략계획을 은폐하기 위하여 북한 공산당은 남북통일 최고입법회의의 서울 개최,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등, 평화공세를 펼치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전쟁발발 소식을 접한 미국은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고 선언하고, 북한은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그 군대를 38선으로 철군시킬 것을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6월 27일에 이르러 미국 대통령 트루만(Truman, H. S.)은 미국의 해군·공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날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 평화와 한반도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문을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조치를 추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곧 이어 6월 28일에는 동경(東京)에 있던 미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MacArthur, D. S.) 원수가 내한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 국방성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인천중동 : 맥아더장군 동상

  이러한 미국의 군사조치는 다시 7월 7일에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반도의 유엔 군사활동을 위하여 미국에 최고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에게 주어졌으며, 한국을 원조하기 위하여 육군·해군·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 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때 한국의 이승만(李承晩)대통령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각서를 썼고, 이것이 이른바 대전각서로서 7월 14일에 수교되었다.

인천중동 : 맥아더장군 동상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고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북한군이 초전에 우세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전쟁을 일으킨 다음날인 6월 26일에 북한의 김일성은 이 전쟁을 가리켜 남한을 ‘해방’시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하여금 조국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방송하였다. 정치가 불안정한 가운데 무방비상태에 있던 한국에 대한 북한의 기습공격은 6월 27일에는 이미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한편,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이 즉시 한국으로 이동하여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전세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여 항쟁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맥아더장군과 그 참모들

  북한군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한 인천상륙작전안이 구상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불과 얼마 되지 않은 7월 15일부터였다. 이 날짜로 유엔군총사령관인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에 인천상륙작전안을 상신하였으나, 이를 위한 군사력의 분산과 인천이 지형상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가장 부적합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고, 오히려 부산 교두보에 증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의 간만의 차가 9m에 불과하지만 6시간은 상륙작전을 위하여 사용 가능하며, 북한군이 부산을 점령하기 위하여 그 지역에 집중적으로 병력을 집결하기 때문에 인천 방어가 소홀하고, 더구나 한국의 수도 서울을 빨리 탈환하는 것은 군인과 민간에게 주는 심리적 영향이 크다는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드디어는 9월 8일에 대통령의 허가를 받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전함 미조리 호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미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는 드디어 9월 15일 새벽에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하고 그 다음날에는 인천을 함락시켰다. 미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 탈환을 목적으로 동진하였고, 미 제7사단은 남진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단절되었고, 한반도의 중부 및 동부산악지대로 패주하였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9월 26일에는 서울에 진입하였고, 완전히 회복한 뒤인 9월 29일에는 서울수복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수도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은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38선에 가깝게 계속 북상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으며, 이 기간 동안 공산군 포로는 1만 2500명에 달하였다.

팔미도등대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하여 북진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을 통일에 두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고 맥아더 사령관도 이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9월 1일에는 미국 트루만 대통령도 “한국인의 자유·독립과 통일할 권리가 있다.”고 발표함으로써 통일 문제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미국 정부는 9월 11일에 소련과 중공이 개입할 위험이 없으면 38선 이북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하는 합동참모본부의 지령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호전됨에 따라 다시 9월 27일에는 38선 이북에서의 군사작전을 허가하였다. 그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이는 무시된 채 중공군의 참전계획이 진행되었다.

해벽을 오르는 상륙군 용사들

   그 해 8월 20일에 주언라이(周恩來)는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리(Lie,T.)에게 전보를 보내 “조선문제의 해결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고 하였으며, 9월 30일에는 다시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방관할 수 없는 사태’라고 그 입장을 밝혔다. 또한, 10월 3일에는 북경주재 인도대사를 통하여 만약에 한국군만이 38선을 넘을 경우에는 중공의 파병은 없을 것이나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 북진하면 중공군이 파병될 것이라 하여, 이것을 미국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유엔군의 진격이 다시 시작된 직후인 11월 25일과 26일에 중국군이 18개 사단에 이르는 막대한 병력으로 서부전선을 공격해 옴으로써 방어선은 붕괴되었다. 공산군은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한국 정부와 많은 민간인은 다시 남하 피난길에 올랐으며, 이것이 이른바 ‘1·4후퇴’이다.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휴전협정이 이루어짐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친 전쟁은 중지되고 휴전이 성립되었다. (다음 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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