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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가봐야 할 서울의 명소, 명동성당. 허준과 동의보감

공룡우표매니아 2016. 8. 22. 04:00

꼭 가봐야 할 서울의 명소, 

명동성당.  허준과 동의보감



서울충무로2 : 명동성당

  사적 제258호. 면적 1,668㎡.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主敎座聖堂)으로, 우리나라 천주교의 상징이자 구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순수한 고딕양식의 연와조 건물이며 1892년(고종 29)에 착공하여 1898년에 준공하였다. 명동성당이 자리잡은 대지는 종현(鐘峴)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일찍이 1784년(정조 8)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명동 부근) 소재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이승훈(李承薰)과 정약전(丁若銓)의 3형제, 권일신(權日身) 형제 등이 모여 종교집회를 가짐으로써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된 곳이기도 하다. 명동성당의 건설은 한국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1888년 4월 조선 정부는 금교령을 발표하며 천주교를 탄압했는데 이 원인이 명동성당 건립 때문이었다. 당시 고종황제는 왕궁보다 더 높은 자리에 훨씬 높은 건물이 올라 가는 것에 분개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이 체결되면서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자, 당시 교구장이던 주교 블랑(Marie Jean Gustave Blanc, 1844~1890)이 성당 부지로 이곳을 매수하여 종현 본당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뒤 1892년 5월 8일 정초식을 가졌다. 설계와 공사 감독은 신부 코스트(E. J. G. Coste, 한국명 고의선(高宜善))가 직접 맡았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 건축의 기술자가 없었으므로 벽돌공, 미장이, 목수 등을 중국에서 데려다가 일을 시켰고, 도중에 재정난과 청일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898년 5월 29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이후 명동성당은 ‘뾰죽집’이라는 이름으로 장안의 명물이 되어 매일 많은 구경꾼이 몰려왔다고 한다. (다음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서울강서 : 허준과 동의보감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30여 년 동안 왕실병원인 내의원의 어의로 활약하는 한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비롯한 8종의 의학서적을 집필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의학자로 우뚝 섰다. 허준은 뼈대 있는 무관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양반 가문 출신인 어머니 영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정실(正室)이 아니었기에, 그의 신분은 중인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신분은 문·무관보다 천하다고 여겨진 의관의 길을 택하는 데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훌륭한 가문의 배경 덕에 허준은 어려서부터 경전·역사·의학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을 수 있었다. 허준은 20대 후반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과거 잡과에 합격했고 그는 과거에 합격한 뒤 1년 만에 임금이나 왕자의 병을 돌보는 지위인 내의에 올랐다. 그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뒤인 1604년 나라에서는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공신 칭호를 내렸는데, 허준은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올라 양평군(陽平君)이라는 공신 칭호를 받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봉해졌다. 후에  선조가 죽자, 그 책임이 허준에게 씌워져 유배를 가기도 했다. 유배지에서 플려나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총 25권으로 그 내용은 내경편(內景篇, 내과), 외형편(外形篇, 외과), 잡병편(雜病篇, 유행병 · 급성병 · 부인병 · 소아병), 탕액편(湯液篇, 약제 · 약물), 침구편(鍼灸篇, 침과 뜸 등)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다음 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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