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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인 여행...762.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동래읍성 해자

공룡우표매니아 2023. 5. 15. 03:00

관광인 여행.......................... 762.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동래읍성 해자(東萊邑城 垓子)

 

동래읍성(東萊邑城)

   역사 : 조선시대에 현재의 동래구 복산동과 수안동 일대에 존재했던 읍성이다. 조선시대에 동래읍성은 일본과의 외교 창구였기 때문에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임진왜란 때는 1592년 4월 14일 그 유명한 동래성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일본군은 동래성을 함락하고 나서 동래성 동쪽에 위치한 망월산에 동래왜성을 축조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완전히 황폐화된 동래읍성을 보수할 여력이 없어 약 140년간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6배에 달하는 규모로 다시 축성하였다. 

부산수안 : 동래읍성 해자(東萊邑城 垓子)

   이후 일제강점기와 경제개발기를 거치며 복산동, 수안동, 명륜동 일대는 도심화가 진행되었고, 동래읍성의 서남부는 완전히 유실되게 되었으며 산등성이를 따라 흔적만 남아 있었다. 이렇게 방치되어 오던 동래 읍성의 흔적들을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에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기 시작했고, 1979년부터 1993년 사이에 여러 차례 복원과 보수를 하여 현재에 이른다. 2005년 5월에 부산 도시철도 4호선 공사를 진행하다 현 수안역 자리에서 조선 전기의 해자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이곳에서 동래성 전투 당시 학살당한 주민들의 유골과 각종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나무위키)

 

   구조 : 조선 전기에 현재의 동래구 복산동과 수안동 일대에 원형의 읍성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조선 전기에 쌓았던 읍성은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의 크기의 17%가 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였으며, 성벽에 치(雉)가 아주 조밀하게 돌출되어 있었고 작지만 해자도 둘러져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지키다 장렬히 전사했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 유적은 1731년 정언섭(鄭彦燮)이 개축한 것을 기초로 한다. 5개의 문과 1개의 암문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3개의 장대를 갖추었다. 또한 모든 문에 옹성이 둘러져 있었다.

    성문(城門) : 1. 주조문(朱鳥門) ・ 무우루(無憂樓) 동래읍성의 남문이며 규모가 가장 컸다. 이층 문루를 올렸으며 바깥쪽에는 주조문(朱鳥門), 안쪽에는 무우루(無憂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2. 지희루(志喜樓) .동문. 3. 심성루(心成樓) .서문. 4. 인생문(人生門) .소문(小門). 5. 은일루(隱一樓) .암문(暗門). 야문(夜門)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은, 다섯 문이 닫힌 밤중에 긴요한 일이 있으면 사용하게 한 문이다. 6. 북문(北門) .북문. 당호(堂號)가 따로 없는 이 문은 현판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 장대(將臺) : 1. 서장대(西將臺) . 동래읍성의 서쪽 장대. 2. 동장대(東將臺) . 동쪽 장대. 내부에 망월대(望月臺)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3. 북장대(北將臺) . 북쪽 장대. 마안산(馬鞍山)의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 동래읍성에서 가장 높은 고지를 점하고 있는 장대이다.

부산수안 : 동래읍성 해자(東萊邑城 垓子)

 

    해자(垓子) :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외곽 해자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1452년에 설치된 동래성 해자는 기초다짐층, 조선전기층, 조선후기층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중 임진왜란기에 해당하는 조선전기층에서 폭 30m x 길이 30m 좁은 공간에서 환도, 창, 찰갑, 투구, 활, 화살촉 등등 당시 동래성 전투에 사용된 다양한 조선군의 무기들이, 임진왜란 당시 무기사를 새로 써야할 만큼 대량으로 출토된 것이다. 이 유적에서는 약 80여 구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남성은 물론, 저항할 수 없는 여자와 아이의 유골에서도 활과 조총, 철퇴에 맞거나 창검으로 찔리고 베인 자국이 발견되었으며, 화살 또는 총알이 뚫고 나간 어린아이의 두개골도 발굴되었다. 한 여성 유골은 일본도로 추정되는 칼로 몇 차례나 목을 베인 흔적이 있었으며, 몇몇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은 턱뼈가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도 있었다. 따라서 이 유적은,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이 자신들이 학살한 시신과 쓸모없게 된 조선군 무기들을 해자에 함께 던져 넣고 메워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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