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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인 여행.....696. 충북 제천시 봉양읍, 최양업 토마스 신부.

공룡우표매니아 2022. 12. 19. 03:00

관광인 여행.................. 696. 

충청북도제천시 봉양읍, 최양업 토마스 신부

 

봉양 : 최양업 토마스 신부

    최양업(崔良業, 1821년 3월 1일 ~ 1861년 6월 15일)은 조선 후기의 가톨릭 사제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본명은 최정구(崔鼎九)이다. 청양 다락골 성지 선전물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는 홍주(지금의 홍성군)골에 속했으나 지금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라는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고 있는 다락골에서 1821년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조부인 최인주가 다락골에서 빈 땅을 개척하여 살았는데,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교우촌이 되었다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사는 한양으로 이사했다가, 안양의 수리산 담배 마을에 정착한 최씨 일가는 이곳에 교우촌을 만들고, 1836년 열다섯 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소속의 선교사인 모방 신부의 천거로 김대건, 최방제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이듬해 1837년 6월 7일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부제 서품을 받고 고향인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만주와 내몽골 일대를 떠돌았다.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입국하였으나, 최양업은 1846년 1월에 입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최양업은 1846년  12월에 재차 입국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홍콩으로 이전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돌아가 조선의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의 일기를 편집하여 기해일기라는 책을 저술하고 이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최양업은 1847년과 1849년 다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849년 청나라천주교회의 강남교구장인 마레스카 주교에게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천주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요녕성에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주일학교 사목을 하다가 그 해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다. 최양업은 수 만리를 돌면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봉양 : 최양업 토마스 신부

    매년 129개의 공소를 돌며 11년 6개월간 사목하였으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신념을 위해 헌신한 성직자였다.조선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은 파견되기 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습을 익힐 것을 마카오 신학교 선생이자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장인 리브와 신부에게 주장하였다. 천주교 신앙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신앙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최양업은 1861년 6월 15일 영남 지방의 사목 활동을 마치고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에 과로와 장티푸스로 40세의 나이에 문경에서 병으로 선종하였다. 그 후 제천시 배론에 안장되었으며, 일제강점기때 비석과 묘비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다가 1945년 광복 이후 비석과 묘비를 세웠다. 김대건 신부는 '피의 순교자'라 하여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순직이었기 때문에 시성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에 '땀의 순교자'라는 호칭이 그에게 붙여졌으며, 2001년부터 한국 천주교회에서 불기 시작한 한국 시복시성운동의 일환으로 2004년 최양업 신부와 124명의 순교자들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교황청에 시복청원을 해놓은 상태이다. 2016년 5월 8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인준을 받아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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