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우표매니아

엄원용

공룡우표매니아 엄원용

우표전시 기념인 교류

2017 관광인 동호회 우표전시회

공룡우표매니아 2017. 8. 2. 04:00

2017 관광인 동호회  천안 우표전시회

(자료 설명)



기 간 : 2017, 7. 31 ~ 8. 4(5일간)   장 소 : 천안 우정공무원교육원 1층   주 최 : 관광인 동호회

후 원 : 한국우취연합. 우정공무원교육원. 동천안우체국

석오 이동녕(1869 ~ 1940)(고종 6 충남 천안 )

  대한제국기에 민권운동·자강운동에 앞장섰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임시정부 지원의 우익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1903년 이상재, 전덕기 등과 손잡고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운동을 전개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방적으로 체결되자 동지들과 손잡고 결사대를 조직한 뒤 매국노의 응징과 일제의 철수를 주장하는 한편, 그들의 야만적인 침략행위를 규탄했다. 1910년 식민지가 되자 망명하여 신흥강습소에서 청년을 육성했다. 독립투쟁 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즉시 비교적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다음 백과)

한국광복군

  1920년대초 해외독립운동의 중추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7년 이후 김구가 주석이 되면서 안정을 되찾았으나 여전히 침체국면에 있었다. 이에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이봉창의거·윤봉길의거를 계기로 한중연합전선의 기틀을 마련했다. 1940년 임정은 광복군 창설을 위해 장제스와 교섭을 추진했다. 조선의용대를 지원하고 있었던 중국군사위원회는 주저했으나 결국 승인했다. 임정은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광복군 창설을 공표했다. 광복군은 국군양성을 통해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국민당정부의 원조·승인이 필요했으므로 한계가 있었다. 광복군은 최후까지 항일전을 전개했으나, 귀국 후 해방정국과 대한민국 창군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다음백과사전)

석오 이동녕(1869 ~ 1940)(고종 6 충남 천안 )

  석오 이동녕 기념관은 이동녕 생가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기념관은 생가지 보수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생가지 보수는 2005년 12월 완료되었으며, 2006년 3월 생가지 주변 부지의 매입 및 2008년 9월 확장 부지의 매입이 완료되었다. 2009년 10월 9일 유품의 인수인계, 2009년 8월 26일 전시물 계약이 이루어졌으며, 2010년 2월 23일 개관하였다. 기념관 입구 전면에 이동녕의 흉상과 뒷면에 ‘대의(大義)’ 휘호 기념비와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다. 제1전시관은 초상화와 영상을 전시하고 있으며, 제2·3전시관은 이동녕의 삶과 사상을 연보, 가계도, 일러스트 만화 등으로 전시하고 있다. 제4·중앙 전시관은 구국의 여정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이전[뜻을 품다]과 임정 수립 및 활동[뜻을 펼치다], 친필 서신·추모글[별이 지다]을 전시하고 있다. 제5전시관은 메시지 영상, 3·1절 기념 연설문[1920]을 전시하고 있고, 제6전시관은 기념사진관·체험 학습 코너로 구성되어 있다. (디지털 천안문화대전)

  한국 광복군의 연원 및 변천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하에, 1919년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제정하여,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하였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는 1919년 말 상하이[上海]에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자체적으로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관할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지역적 차이·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그 뒤 윤봉길(尹奉吉) 의거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자, 김구(金九)는 1934년에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이칭: 한인훈련반)을 설치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도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 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를 설치하고 광복군 창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는 상황에서 여의치 않았다. 비로소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정착하면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천명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成立典禮)는 충칭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거행되었으며, 총사령에 지청천(池靑天, 본명 池大亨),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 총무 처장에 최용덕(崔用德), 참모 처장에 채원개(蔡元凱), 부관 처장에 황학수(黃學秀), 경리 처장 겸 정훈처장에 안훈(安勳, 본명 趙擎韓), 훈련 처장에 송호(宋虎, 본명 宋虎聲), 군무 처장에 유진동(劉振東)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그리고 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支隊)를 편성하였다. 제1 지대장에 이준식(李俊植), 제2 지대장에 김학규(金學奎), 제3 지대장에 공진원(公震遠), 제5 지대장에 나월환(羅月煥)이 임명되었다. 그런데 나월환은 1942년 3월 시안(西安)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당시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하였다. 그리고 광복군은 병력 모집을 위한 기구로 5개의 징모분처(徵募分處)를 설치하였고,  이들은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공작(招募工作)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광복군 창설 1년여 만에 3백 여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다음 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바로아래 여기 ♡공감 살짝 눌러주고 가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