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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우표매니아 엄원용

맥시멈. 영원엽서(그림)

모전교, 광통교(광교), 장통교

공룡우표매니아 2015. 5. 19. 04:00

모전교,  광통교(광교),  장통교

 

  늘 반가운 블친님, 여러분들의 격려속에 청계천 24 우표문화축제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장장 15일간 세 파트로 나누워 진행된 "우표문화축제" 는 낙엽이 고운 색으로 변하는 가을로 또 이어집니다. 이때 또 세곳의 다리 엽서 또 보실 수 있을겁니다. 그때 다시 격려 부탁드립니다.

모전교

  무교동 3번지 북쪽에 있던 다리이다. 우전교(隅廛橋), 모교(毛橋), 신화방동구교(神和坊洞口橋), 신화방동입구교(神和坊洞入口橋)라고도 불렸다. 모전(隅廛)이란 '과일가게'를 이르던 옛말로, 모전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모전교로 이름지었다. 1412년 태종 12년 석교로 개축하였다. 영조 때부터 모전교로 불리게 되었다. 사료에는 신화방동입구교()로 나와 있는데, 이 다리는 1412년(태종 12)에 세워졌다. 모전교라는 이름은 영조 때 만들어진 〈도성지도()〉에 처음 보인다. 지금의 무교동은 모전교 부근에 있던 모교동()과 구별하기 위하여 모교와 발음이 비슷한 무교동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모전교가 있던 자리는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조금 아래쪽으로 추정된다. 2003년 7월부터 시작된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새롭게 놓였다. (두산백과)

광통교(광교)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이여서 옛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다.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대광교(大廣橋), 광교(廣橋) 등으로도 불렸다. 태조 때에 흙으로 축조되었다가 폭우로 인하여 무너지자 1410년 (태종 10년) 8월에 돌로 다시 축조하였다. 다시 축조했을 때 정릉의 석물로 만들었는데,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에게 넘겨 주려 하니 이에 화가 난 태종이 난을 일으켜 방석을 죽여 왕위에 올라 강씨의 묘를 옮기며 일부 돌들을 모두가 밟을 수 있게 옮겨 놓은 것이다. 또한 그 돌들은 모두 거꾸로 놓았고, 석교로 만들어진 이 다리가 가장 역사가 오래된 다리이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밝기 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해, 그 때 한양에서는 광통교가 가장 붐비었다고 한다. 청계천은 조선시대에 도성 한 가운데로 흐르면서 주변 산지에서 흘러내리는 유수와 민가의 하수를 유출하던 큰 배수로의 구실을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로부터 계속 준천과 복개의 논란 속에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장통교

  장통방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했다. 형태는 하랑교나 효경교와 비슷했다. 현재 장교동 한화빌딩 앞에 위치하였다. 장창교(長倉橋), 장교(長橋)라고도 했다. 이 부근에서 남산동천이 합류했다. 조선시대 5부 52방 가운데 하나인 장통방()이 있던 자리라 하여 장통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리 근처에 긴 창고가 있었다 하여 장창교() 또는 장찻골다리라고도 하고, 장통교를 줄여서 장교로 부르기도 하였다. 지금의 장교동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청계천을 복개하기 전 다리 서쪽 기둥에 '신미개조()', '기해개조()'라는 여덟 글자가 남아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 두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흐르는 창동천()과 중구 회현동()을 거쳐 내려오는 물줄기가 소광통교()에서 만난 뒤, 다시 남산동천의 물줄기와 합해져 청계천의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이 장통교가 있던 자리이다. 청계천을 복개할 때 없어졌는데, 2003년 7월부터 추진된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5년 새롭게 건설되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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