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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인 여행...1179.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권율장군 묘.

공룡우표매니아 2025. 4. 22. 03:00

관  광  인   여  행 ..................... 1179.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권율장군 묘.

권율 장군 묘(權慄 將軍 墓)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조선시대 문신 권율 장군 묘역에는 장군의 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창령조씨와 후부인 정경부인 죽산박씨가 안장되었다. 그 위로 형 권순(權恂)과 부친 권철(權轍)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권율(權慄, 1537~1599)은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문신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무장으로서의 업적이 가장 두드려진다. 그는 충청남도 금산의 이치(梨峙) 전투, 수원의 독산성(禿山城) 전투, 그리고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 등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있으며 좌우로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이 각각 1쌍씩 있다. 그 외에 묘역 아래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1972년 5월 4일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양주장흥 : 권율 장군 묘(權慄 將軍 墓)

    특이하게도 40살이 되도록 관직을 얻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친구들이 권율에게 "과거를 보든지 집안 이름을 써서 관직이라도 얻든지 해야지, 하니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출세가 늦을 걸 걱정하겠는가?"며 반박했다고 한다. 벼슬길에 뜻을 두게 된 이유는 아버지 권철 때문이라고 전한다. 아버지 권철은 죽기 직전에 막내아들 권율을 빤히 쳐다보다가 "널 내가 낳았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는데 이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들어가 과거 급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벼슬길에 늦게 올라 1582년(선조 15)에 식년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정9품)에 제수되었으니 이 때 나이가 46세였다. 그 후 죽은 영의정의 아들이자, 현직 관료들의 친동생이라서인지 승진은 빠른 편이라 전라도 도사(종5품), 예조 정랑, 호조 정랑(정5품), 경성 판관 등을 거쳤다. 1592년 봄에 베이징에 간 역관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요동 지역을 어수선하게 했다는 말이 나와서 국문하는 일이 있었는데 권율도 사건의 불똥을 맞아 파직되고 만다. 

    그러나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권율이 능력이 있다는 신하들의 간언을 듣고 다시 기용해 전라도 광주 목사에 임명되면서 임지로 내려가 부임했다. 10월 북진하던 권율은 성급하게 북상했다가 피해를 본 용인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우선 수원의 독성산성(독왕산성)에 주둔했다. 권율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명군이 참전하지 않은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계속 격파해서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

    권율 본인은 행주대첩을 자신의 최고 전공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항복의 <백사집>에 의하면 권율은 이항복에게 "원래 웅치와 이치의 싸움이 더 어려운 여건이었는데 내가 여기서 싸워 이겨 호남이 보존될 수 있었네. 그러나 행주 전투는 이미 적의 기세가 쇠한 상태였고 내가 공이 있던 상태에서 이뤄진 전투니 이것이 내가 쉽게 이길 수 있었던 이유이지. 하지만 나는 행주 싸움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 사람 일은 참 모를 일이구만."이라는 식으로 심경을 토로했다고 한다. 의례적인 겸양의 말로도 보이지만 권율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자신의 싸움은 웅치 - 이치 전투였다는 소리다.

양주장흥 : 권율 장군 묘(權慄 將軍 墓)

    사실 권율은 유명세에 비해서 알려진 일화나 기록이 적은 편이다. 이렇게 된 것은 자식들이 아버지에 대한 기록인 행장을 작성하는 풍습이 있었던 조선 사회에서 아들이 없었다는 점이 매우 결정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권율의 자식은 첫째 부인인 창녕 조씨가 낳아서 이항복과 결혼한 딸 1명 뿐이다.) 그래서 권율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겨준 사람은 다름 아닌 사위 이항복이며 권율의 묘지명도 이항복이 썼다.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을 보면 장인어른 권율에 대한 기록도 자주 볼 수 있다. 다만 둘째 형 권순의 아들인 권익경을 양자로 들여서 후사를 이었고 조선 말엽인 1885년에 9세손 권창섭에 의해 <만취당유적(晩翠堂遺蹟)>이라는 권율의 시문집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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