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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인 여행...1.020,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2가,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공룡우표매니아 2024. 8. 15. 03:00

관 광 인  여 행.................. 1.020,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2가,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國債報償運動記念公園)

    1907년 대구에서 비롯된 국채보상운동의 시민정신을 기념하고, 제2의 국채보상운동 전개로 IMF 경제난 극복과 대구 도심지 내 녹지 공간 확보 및 시민의 안락한 휴식 공간 제공을 위하여 명칭 또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으로 정하여 1998년 3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중구 동인동2가에 조성된 공원이다. 시민들은 주로 '국채보상공원' 이라고 줄여 부른다. 대구광역시 시내버스의 영어 안내에도 'Gukchaebosang Park' 로 나온다. 2000년 경북고등학교 골든벨 문제로도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대구 :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1904년의 고문정치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강제로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다. 1905년 일본은 식민지 기초 작업의 제일보로 한국의 문란한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화폐정리채 3백만 원을 차입해 들여왔다. 이어 그 해 12월에는 화폐개혁에서 비롯된 공황을 구제한다면서 1백 5십만 원을 또 차입하여 들였다. 통감부 설치 이후 일제는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각종 명목으로 고이율의 차관을 들여오게 하여 국채가 격증되어 갔다. 이러한 일본의 계속된 차관공세로 인해 2년여 사이에 한국정부는 원금만 하여도 1천 6백 5십만 원에 달하는 채무를 지게 되었고, 해마다 늘어나는 이자 또한 상당한 금액이었다.

    1907년 2월에는 당시 신채로 약 3백 5십만 원의 국채를 정리하여 1천 3백만 원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국채는 당시의 국가 재정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고액이며 또한 그대로 둘 경우 해마다 고율의 이자가 가산되어 마침내 전국토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고 2천만 민족은 그들의 노예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운의 절박함에 드디어 1907년에 이르러 거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제일 먼저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고 나선 것은 경상도 대구지방의 애국지사들이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라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의를 연뒤 부사장인 서상돈이 국채보상문제를 제의하였다.

    김광재 서상돈 등은 (국채보상 취지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반포하면서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서울에서 취지문을 맨 처음 보도한 것은 2월 16일자의 (제국신문)이었다. (제국신문)의 보도는 즉각 서울시민과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국채보상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대동광문회는 1907년 2월 21 일 대구북문밖 북후정에서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상돈 등 수 천명의 유지 · 신사들과 시인들이 참석하였다. 군민의 호응은 열광적인 것이어서 만장일치로 박수갈채하고 의연금을 내었는데, 젊은이, 노인 등 모든 신사들, 젊거나 나이든 모든 부녀들, 술파는 노파들, 불구의 거지아이들, 푸줏간 정육상들, 책을 낀 어린이들과 제기 차는 아이들까지 모두 강개하고 분노하며 의연금을 내었다고 한다.

대구 :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서울에서는 국채보상기성회가 설치되어 운동을 전국화, 조직화 했으며 이에 기탁되는 의연금을 보관하고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통합기관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동년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 한규설, 양기탁 등 임원을 선출하였다. 이처럼 국민들의 애국운동이 고조될 즈음에 고종황제가 단연에 참가함으로써 이 운동은 범국민운동으로 승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대구 남일동의 7부인이 결성한 패물폐지 부인회가 전국 여성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 파급과 성과에 놀란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대한매일신보사 총무인 양기탁을 근거도 없이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가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쇠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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