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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재 및 상징 엽

경기문화재 여행 .....48. 수원시 팔달로의 수원종로교회

공룡우표매니아 2021. 6. 28. 03:00

경기문화재 여행 ..... 48.  

수원시 팔달로의  수원종로교회(水原鍾路敎會)

 

수원종로교회(水原鍾路敎會)

  기독교가 수용된 이래 수원 지역은 선교지역 분할협정에 따라 미감리회의 선교지역이 되었다. 1893년부터 스크랜턴(W. B. Scranton) 선교사가 담당하다가, 1898년부터는 스웨어러(W. C. Swearer, 徐元輔) 선교사가 맡아 선교활동을 하였다. 1899년 5월 스크랜턴이 파견한 감리교인 ‘서너 명’이 수원 읍내로 이사와 정착하였고, 수원 감옥에 갇혀 있던 기독교인들이 감옥 안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김동현은선교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1900년 가을 수원 읍내에 장소를 매입했다가, 화령전과 가깝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나, 계약을 취소한 후 석방되었다. 그리고 당시 이 장소만 아니면 수원 다른 곳에서 얼마든지 부지구입이 가능하다는 허가를 받았다. 1901년 12월 전도인으로 파송된 이명숙은 북문 안 보시동(지금 북수동 116번지)에 13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였고 그 일가가 이주, 정착하였다. 선교사 휴양관을 겸한 예배당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2월 남자 3명과 여자 4명을 처음으로 등록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수원종로교회가 출발하였다.

해방 후 수원종로교회(水原鍾路敎會)

  이 교회는 2년 만에 크게 성장하여 교인 수가 160명이 되었다. 교회 안에는 22명이 출석하는 남자 매일학교와 15명이 출석하는 여자 매일학교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는데, 이 학교는 근대 수원 교육의 효시가 된 삼일여학교와 삼일남학교로 발전되었다. 1907년에는 신유사옥과 병인박해로 피 흘린 순교의 터인 종로 네거리로 이전했다. 초기 교회에는 삼일학교 관련 교육활동과 국채보상운동, 기호흥학회, 3·1운동 등을 통해 수원 지역의 변화를 이끌어 나가는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910년 교인의 수가 373명으로 늘어났고, 1912년에는 1,200명으로 증가하면서 교세성장을 주도하였는데, 1933년에는 교인들의 헌금과 선교회 보조 등으로 새 교회 2층 건물을 봉헌하였다. 그 안에는 기숙사를 마련하여 사경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계몽운동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민족교회 정신을 바탕으로 나눔의 정신으로 이어 전교인 1,100여 명이 노숙인 급식 등을 지원하는 ‘사랑의 손길’을 외부 도움 없이 교인들만의 힘으로 진행하는 등 수원의 대표적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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