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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 초일커버(FDC)

공룡우표매니아 2020. 10. 30. 03:00

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우표 

초일커버(FDC)

 

우표발행일 : 2020. 10.  21    우표번호 : 3464    디자인 : 청산리 전투    디자이너 : 신재용

인쇄 / 색수 : 평판 / 4도    용지 : 평판 원지    인쇄처 : 한국우편사업진흥원(Royal Joh Xnschede)

  35년의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에게 큰 승리를 안겨준 청산리 전투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정사업본부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였던 청산리 전투의 전승 100주년을 기리고자 기념우표를 발행합니다.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군은 두만강과 압록강 접경지에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독립군은 1919년 하반기부터 국내진입작전을 펼쳤고, 1920년 들어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 단체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습니다.

  그 직후에 일어난 전투가 1920년 6월 7일에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봉오동 전투입니다. 일본은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만주의 독립군을 없애기 위해 만주의 군벌에 압력을 가하는 외교적인 노력과 더불어 대규모 군사 동원을 계획하였습니다.

  일본은 9월에 마적이 훈춘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는 사건을 꾸민 뒤 이를 명분 삼아 중국 땅인 만주에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군사력을 비축하고자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연합부대’ 등으로 나뉘어 북간도를 떠나 백두산 방향으로 이동하는 대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백두산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던 독립군을 일본군 기병 등이 추격해 오자 독립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싸웠습니다. 그 첫 전투가 1920년 10월 21일에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싸워 승리한 백운평 전투입니다. 그리고 10월 22일, 청산리 전투에서 가장 큰 싸움이었던 어랑촌 전투에서 북로군정서군은 홍범도가 지휘하는 연합부대와 일본군을 협공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이후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연합부대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은 각자 싸우거나 함께 힘을 합하여 싸우며 엿새 동안의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이기는 쾌거를 이루었고 독립군의 기본 군사력을 비축할 수 있었습니다. 6일간 치러졌던 청산리 전투는 사실상 한국 독립운동사 최대의 승전보이자 ‘대첩(大捷)’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우표는 독립군의 전투정보가 실린 독립신문 제88호(1920년 12월 25일자)의 보도기사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했던 서양화가 김태(1931~)의 민족기록화 <청산리 전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념우표를 통해 100년 전 이맘때 울려 퍼진 일본군을 향한 독립군의 함성을 떠올리며 자랑스러운 항일독립운동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김좌진장군은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하였다. 이듬해에는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여 근대화에 앞장섰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후 대한협회(大韓協會)ㆍ기호학회(畿湖學會)ㆍ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등의 간부를 지냈다.

  1913년에는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한 후 1917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 후 13년간 평생을 항일전투에 몸바쳤다. 3ㆍ1운동 후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20년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있었던 청산리전투를 총지휘하여 일본군 제19ㆍ21사단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3,300여 명의 일군을 섬멸시키는 독립군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그 뒤 부대를 흑룡강 부근으로 이동,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여 부총재를 지냈다.

  1925년에는 영안(寧安)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여 군사부위원장이 되었다. 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을 지내면서 정예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1929년에는 한족연합회(韓族聯合會)를 조직하여 주석이 되어 황무지개간ㆍ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러던 중 고려공산청년회의 김일성(金一星)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에게 암살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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