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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인 여행...824.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 1운동순국기념관

공룡우표매니아 2023. 9. 15. 03:00

관 광 인  여 행....................................... 824.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 1운동순국기념관

 

화성 :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3·1운동이 진행되던 때 수원과 화성군은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고 치열한 만세 운동이 벌어진 곳이다. 더욱이 3월 28일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 시위와 4월 3일 우정면 화수리 시위 때에는 시위 대원들이 발포하고 도주하는 일본 순사 2명을 처단한 바 있다. 이에 일제는 수원군 일대 주민들을 학살하고 민가를 방화하는 등 대대적인 보복 조치를 취했는데 그 일환으로 4월 15일 오후에 3.1 운둥 시위에 적극적이었던 제암리에 출동하여 주민들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교회당 문을 잠근 후 총을 무차별 난사하여 주민들을 집단 학살하였고 짚더미에 석유를 뿌려 불까지 질렀다. 1982년 9월에 이 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 할머니의 고증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고, 최응식 할아버지의 증언에 따라 불에 뒤엉켜 있는 23위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9월 29일 합동 장례식을 거행한 후 교회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고, 불탄 교회 자리에 순국 기념탑을 세웠다.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은 2001년 3월 1일에 개관하였다. (old1003307.tistory.com아 ! 생명이 있기에)

    유적지 정원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두 손에 카메라를 들고 너럭바위에 앉아 있는 스코필드(FranWilliaSchofiel석호필 1889. 3. 15. ~ 1970. 4. 12.)선교사의 동상이다.일제의 야만적이고 잔혹한 제암리 학살 소식을 듣고 그는 열차를 타고 수원역에 내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화성 제암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려 왔다.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일제의 만행에 분노한 그는 일본 헌병 몰래 현장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써서 "수원에서의 일본군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캐나다 선교부로 보내 여론화 하였고.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란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스코필드 선교사의 보고는 장로교 기관지인 ‘장로교 증인(Presbyterian witness)’에 실려 국제 사회에 알려졌다.

    일제의 악랄한 만행이 국제 사회에 알려지자 당시 일제 식민 통치에 우호적이던 해외 언론들은 일제히 등을 돌리며 거센 비난 여론을 몰아왔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일본의 야만적인 압제 행위를 비판하는 글들을 언론에 기고하고, 하세가와 총독이나 야마가타 정무총감 같은 책임자들을 직접 찾아가 항의하는 등 한국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의기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인사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도움을 주는 등의 행동으로 일본에게는 가장 과격한 선동가’로, 우리 동포들에게는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려졌다.

화성 :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일제의 추방으로 1920년 강제 출국했던 그는 해방 후인 1958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로 활동하면서 육영사업과 언론활동 등에 힘쓰다 1970년 이 땅에서 별세했다. 대한 민국 정부는 그에게 1960년 대한 민국 문화 훈장(1960년)과 건국 공로 훈장(1968년)을 수여했고, 그의 시신은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현충원 충열대 96호.국립 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비명에는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 이다. 2016년 3월에는 국가 보훈처로부터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동상 뒤 대리석 벽면에 스코필드 박사의 업적과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 일지를 새겼다.

 (http://old1003307.tistory.com/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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