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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행우표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 우표 초일 자료(M/C). (FDC). 소개

공룡우표매니아 2023. 8. 24. 03:00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 우표 

초일 자료(M/C). (FDC) 소개

우표발행일 : 2023년 8월 14일. 명칭 :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
우표번호 : 3703 - 3704. 디자이너 : 유지형. 발행량 : 총 624.000장.
디자인 : 프랭크 월리엄 스코필드. 조지 루이스 쇼
액면가격 : 430원. 인쇄 / 색수 / 특수처리 : 평판 / 4도. 은박.
전지구성 : (4 X 4)(168mm X 166mm). 용지 : 평판 원지.
인쇄처 : 한국우편사업진흥원 / Cartor for POSA
다음 발행 우표 : 한국 - 스위스 공동우표. 2023. 9. 7일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한국 독립운동을 돕고 일제에 대항했던 외국인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특히 실존 인물을 재현한 작품이 많아 당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외국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기념우표에서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대표적 인물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와 조지 루이스 쇼를 소개합니다.

맥시멈 카드(M/C).  조지 루이스 쇼(1880~1943).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한국명: 석호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한국명: 석호필)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 의학자이자 선교사이며, 1916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로 한국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1919년 3·1운동 첫날부터 사진을 찍고 기록하여 해외에 알렸으며,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 사건 현장에도 찾아가 일제의 만행을 보고서로 남겼습니다.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그는 틈틈이 강연과 기고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알리며 일제를 비판했습니다. 광복 이후에 다시 내한하여 수의병리학을 가르쳤고, 강연과 언론 기고에서 한국인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70년 4월 12일에 서거하여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초일커버(FDC). 조지 루이스 쇼(1880~1943)

    조지 루이스 쇼(1880~1943)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중국 안동현(현 단둥)에서 무역업과 선박업을 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연락망 조직인 ‘연통제‘의 운영을 돕기 위해 자신의 무역선박회사 ’이륭양행‘에 교통사무국을 설치한 일이 대표적입니다. 1919년 3·1운동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돕기 시작한 그는 자신의 선박을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입출국을 지원하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활동을 도왔습니다. 그러다가 1920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쇼는 안동으로 돌아간 후에도 1938년까지 계속 독립운동을 돕다가 1943년 11월 13일에 푸저우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한국명: 석호필)

    영국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농장의 가축관리인 조수로 일하다가 1907년 홀로 캐나다로 이민하였다. 농장에서 일하면서 토론토대학교(University of Toronto) 온테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했다. 1911년 같은 학교에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3년 9월 음악을 전공한 앨리스(Alice)와 결혼하고, 1914년 모교에서 세균학을 강의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에비슨(O. R. Avision)의 초청과 권유로 부인과 함께 1916년 11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이 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교수했다. 그때부터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배 하에 있던 한국인을 마음으로부터 동정하고 사랑하였다. 1919년 3・1운동 첫날부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 4월 15일에 일어난 수원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 사건 현장에도 몸소 찾아가 제암리와 수촌리 ・ 화수리에서 있었던 일제의 만행에 관한 보고서를 남겼다.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조지 루이스 쇼(1880~1943)

    조지는 1900년부터 조선 평안남도 은산금광에서 회계로 근무했는데 채산성이 맞지 않아 1907년 청나라 봉천성 봉황청(鳳凰廳) 안동현(安東縣)으로 옮겨 무역 회사 겸 선박업 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세웠다. 1912년에 일본인 사이토 후미와 결혼하였다. 후미와의 사이에서 아들 새뮤얼 조지 쇼와 루이스 쇼를 낳았다. 둘째 아들인 루이스도 일본인과 결혼해 막내며느리도 일본인이었다. (나무위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한국명: 석호필)

    즉, 4월 17일 제암리교회 사건 소식을 듣고, 다음 날인 18일 자신의 자전거를 가지고 9시 열차편으로 수원까지 갔다. 다시 자전거로 사건 현장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고 조사하였으며 같은 날 오후 수촌리도 방문하여 부상자들을 도와주었다. 이 때 작성한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The Shanghai Gazette)』 1919년 5월 27일자에 서울 주재 익명의 특별통신원(Special Correspondent)이 4월 25일 보내 온 기사로 실렸다. 같은 무렵 작성한 「수촌 만행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rocities)」는 비밀리에 해외에 보내져 미국에서 발행되던 장로회 기관지 『프레즈버티어리언 위트니스(Presbyterian Witness)』 1919년 7월 26일자에 실렸다.

조지 루이스 쇼(1880~1943)

    1919년에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같은 해 3월에 3.1 운동도 일어났는데 조지 쇼는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그해 7월부터 자회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소를 설치해 임시정부와 국내 사이의 연락책을 수행하며 무기 운반, 군자금 전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계림호라는 군수지원함의 함장을 맡고, 1919년 일제가 회유를 위해 남작 작위까지 수여한 김가진의 임시정부로의 망명을 도왔으며, 같은 해 11월 대한제국의 황족인 의친왕 추가 망명 계획에도 동참[5]했으나 후자는 미수에 그쳤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한국명: 석호필)

    그 후에도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들을 조사하여 영국의 성서공회 총무 리슨(Ritson)을 거쳐 토론토의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A. E. Armstrong) 목사에게 보냈다. 그 내용은 다시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에 보내져 거기서 1919년 7월에 발행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 증거자료로 실렸다. 그가 찍은 사진 필름은 상하이 밀사 정환범(鄭桓範)을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전해져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도 일부가 실렸고, 영문 사진첩 『한국 독립운동(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1919)에 실렸다.

조지 루이스 쇼(1880~1943)

    1920년 7월에 일본 정부는 그를 계획적으로 소위 내란죄의 명목으로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그 후 4개월만인 1920년 11월 19일에 영국 정부의 강력한 요구로 보석으로서 석방된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있었지만, 조지 쇼 체포에 관해 영국의 항의가 빗발쳤고 자칫하면 조지 쇼 체포 문제가 영국과의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1943년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무위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한국명: 석호필)

    1945년 8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해방이 되자 한국의 친지들에게 축하편지를 보내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6・25전쟁 직후인 1954년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서 66세로 은퇴하였다. 1957년에는 부인 앨리스가 사망했다. 그동안 한국 친구들이 수차례 한국에 돌아올 것을 권했으나, 건강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응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195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국빈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하여 가료를 받다가 1970년 4월 12일 81세로 별세하였다. 장례는 4월 16일 광복회 주최의 사회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고 유해는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캐나다인으로 우리 겨레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생애를 바치신 거룩한 스코필드 박사 여기에 고요히 잠드시다.” 라고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이번 기념우표에는 두 사람의 모습 및 업적과 관련된 자료를 담았습니다. 변지 좌측에는 스코필드가 3·1운동 당시 모습을 촬영한 대한문 앞 만세시위 사진이 있고, 그 아래에는 사진기로 촬영하는 모습을 담은 스코필드의 동상(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소재)이 있습니다. 우측 상단에는 쇼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는 1920년 8월 11일 자 동아일보 기사와 일본을 방문했던 쇼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우표를 감상하며 광복절을 맞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들의 공로를 기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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