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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성여자대학교 창학 100주년 FDC(초일커버)

공룡우표매니아 2020. 4. 27. 04:00

덕성여자대학교 창학 100주년 FDC(초일커버)


우표 발행일 : 2020. 4.  16   우표번호 : 3446   디자인 :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디자이너 : 유지형    

인쇄 및 색수 : 평판 4도 / 금박   용지 : 평판원지   인쇄처 : 한국우편사업진흥원(Southern Colour Print)

  덕성여자대학교는 여성독립운동가 차미리사 선생이 3 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설립한 교육 기관으로 여성의 손으로 만든 자립적, 자생적, 자각적 여성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성 인재 육성에 힘써온 덕성여자대학교는 올해 창학 1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우정사업본부는 이를 기념하여 덕성여자대학교 창학 100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합니다.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쓴 3 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 1운동의 수많은 의의 중 하나는 이날을 기점으로 여성들의 사회활동과 계몽운동이 활발해졌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경제적 정신적으로 억압받던 여성들은 서서히 자아를 찾겠다는 열망과 의식을 키우며 여성 계몽운동에 호응하고 참여했습니다.

  구한말, 미국과 중국 유학을 거쳐 여성교육과 사회운동에 앞장섰던 차미리사는 이러한 시대 흐름을 읽고, 1920년 4월 19일에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했습니다. 이와 함께 가정에서 가사만 도맡고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에 주목하여 부인야학강습소를 열었습니다.


  기존의 야학을 발전시킨 이 강습소는 3 1운동 이후 등장한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자 외국인이나 외국 자본의 도움 없이 온전히 우리나라 여성의 힘으로만 세운 여성교육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이 무렵 동아일보에는 조선여자의 교육!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올시다 로 시작하는 차미리사의 기고문이 실려, 사람다운 값어치 없이 살아온 여성의 역사가 인류의 큰 수치 라는 내용으로 여성교육의 시급성을 알렸습니다

  학생 10명으로 시작된 강습소는 1920년 10월에 160여 명 규모로 커졌고 마침내 1921년에 새로운 학사를 세우고 근화학원(槿花學園)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근화학원은 1925년에 근화여학교로 승격하여 사진, 재봉, 자수 등 실용적인 여성교육을 펼쳤고, 학교 이름도 1935년에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바꾸었습니다.

  1930년대가 되면서 재정난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1936년에는 첫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피할 수 없었고, 특히 무궁화를 뜻하는 학교 이름에 대한 압력이 거세져 차미리사는 교명을 덕성(德成)으로 바꿨습니다. 광복 이후 여성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하여 1950년에 덕성여자초급대학을 세웠고, 1987년에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덕성여자대학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라는 차미리사 선생의 창학 이념은 오늘날 덕성여대 학풍의 근간이 되어 여성으로서의 자부심과 강한 비판 의식을 일깨우며 민주적 이고 투명한 학생자치활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현재 덕성여자대학교는 차미리사교양대학을 포함한 5개 단과대학이 있으며, 39개 전공을 개설하여 학생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차미리사(車美理士) 선생 : 차미리사 선생은 1879년 8월 21일(음력) 서울 아현동에서 ‘섭섭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열일곱에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3년 만에 남편 김씨와 사별한 후 기독교를 받아들여 상동교회에서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후 그는 교회의 관습에 의거하여 남편 성을 따라 ‘김미리사’라는 이름으로 사회 활동을 하였다. 

  중국 유학을 마친 차미리사 선생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1905),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동교육회 발기인이 되었다(1907). 이것이 그의 첫 국권 회복운동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교육 운동, 사회활동, 독립운동, 언론활동 등을 활발하게 펼친 차미리사는 미주리주 캔사스에 있던 스캐리트 성경학교 에 입학하였다(1910).

  학업을 마친 후, “외국에 있느니 보다는 차라리 고국에 돌아와서 여러 동지들과 손을 잡고 직접으로 사회의 일도 하며 청년 여성을 교육시키어서 우리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귀국하였다(1912). 조국을 떠난 지 10여 년만으로 그의 나이 서른 네 살 되는 해였다. 귀국 후 배화학당 사감 및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주는 교육을 하던 차미리사 선생은 3·1 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산하에 부인야학강습소를 설치하였다(1920).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교육운동을 벌인 결과로 세운 근화학원은 조선 사람의 뜨거운 사랑과 땀과 피의 결정체였다. 이후 근화학원은 근화여학교로 승격되었으며(1925), 다시 재단법인 근화학원으로 설립인가를 받았으며(1934), 산하에 근화여자실업학교를 개교하였다.(1935) 그러나 일제의 압력으로 근화를 덕성으로 개명하였다(1938).

  창학이념과 인재상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 교육목적 : 덕성을 갖춘 창의적 지식인 육성,  교육목표 : 창의적 능력배양, 올바른 가치관 실현. 융합적 사고 함양.  인재상 : 창의적 지식인. 협력하는 전문인,  실천하는 시민   핵심역량 : 창의성, 공감능력, 진취성

  덕성여자대학교 창학 100주년 기념우표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대학 도서관과 울창한 나무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올 한 해 새로운 100년을 향한 재도약을 주제로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계획 중인 덕성여자대학교. 기념우표를 통해 차미리사 선생의 창학 이념과 생애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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