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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우표. 초일자료(M/C. FDC)

공룡우표매니아 2023. 2. 2. 03:00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우표. 초일자료(M/C. FDC)

(M/C.= 맥시멈 카드.   FDC. = 초일커버)

우표발행일 : 2023년 1월 27일   우표번호 : 3636.   디자이너 : 김미화  
디자인 : 김상옥 의사와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장면 
명칭 :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용지 : 평판  원지.    
인쇄 및 색수  : 평판 / 4도 / 금분.  인쇄처 : 한국우편사업진흥원 / Cartor

   일제강점기에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김상옥 의사는 서울 한복판에서 군경 1천여 명과 대치했던 ‘일 대 천 서울시가 전투’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올해는 목숨을 던져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을 되살린 김상옥 의사의 순국 100주년입니다.

    가난한 집안의 소년 노동자였던 김상옥 의사(1889-1923)는 형제들과 돈을 모아 동대문 앞 영덕철물점을 창업하여 청년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나 그는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동업조합’을 결성하여 일본 상권에 대항하였고, 1919년에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온 시간과 힘을 다했습니다.

M/C = 맥시멈 카드

   ‘혁신단’을 조직하고 비밀신문 ‘혁신공보’에 독립운동 소식을 알리다 일경의 추적을 받은 김상옥 의사는 일제를 직접 타격할 ‘암살단’을 조직했습니다. 1920년 8월에 총독 처단, 일제 주요 기관시설 파괴 등을 계획했으나 아쉽게도 거사 직전에 발각되었고, 일제의 추적을 피해 은신하였다가 그해 10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탈출했습니다. 그곳에서 김구, 이시영, 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을 함께했고, 항일 무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 재조직에 관여했습니다.

1922년 12월에 국내로 돌아와 다시 한번 총독 처단과 일제 주요 기관시설 파괴를 계획하고, 1923년 1월에 총독이 일본제국 의회 참석을 위해 동경으로 가는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의사와 동지들은 첫 행동으로 독립운동가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제를 향해 경고의 신호탄을 쏘았습니다. 이후 일제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삼판통(현 후암동) 은신처에서 탈출하여 다시 몸을 숨겼으나, 1월 22일에 서울 효제동 은신처마저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군경 1천여 명으로 둘러싸인 4중 포위망 속에 총격을 벌이다 김상옥 의사는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라는 결심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한민족의 의기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우리 민족은 3·1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희망과 결의를 다시 다지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한당사령부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김해(金海). 별명은 김영진(金永鎭), 아호는 한지(韓志). 서울 출생. 아버지는 한말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를 다녔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3·1독립운동 이후부터였다. 그 해 4월 동대문교회 안의 영국인 피어슨여사 집에서 혁신단(革新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신공보』(뒤에 『독립신문』으로 개제)를 발간해 독립사상을 계몽, 고취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고관 및 민족반역자에 대한 응징 및 숙청을 기도하였다. 특히, 1920년 4월에는 한훈(韓焄)·유장렬(柳漳烈) 등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민족반역자 서(徐)모 외 수명을 총살하였다. 또한 오성헌병대분소(烏城憲兵隊分所)를 습격해 장총 3정과 군도(軍刀) 1개를 탈취하였다.

   1920년 8월 24일에 미국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자, 그 해 5월부터 김동순(金東淳)·윤익중(尹益重)·신화수(申華秀)·서대순(徐大淳) 등의 동지를 지휘해 환영하기 위해 나오는 총독 사이토[齋藤實]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계획은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일본경찰에게 탐지되었다. 동지들이 붙잡혀 단독으로 거사를 추진했으나 여의치 않자, 10월 말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 뒤 11월 임시정부요인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신익희(申翼熙) 등과 독립운동 거사계획에 참여하는 동시에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21년 7월 독립운동자금의 모금을 위해 한때 귀국해 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모금하여 다시 상해로 들어갔다. 이 무렵 한당사령부장(韓黨司令部長)을 맡게 되었다. 1922년 11월 중순 상해에서 임시정부요인 이시영·이동휘(李東輝)·조소앙·김원봉(金元鳳) 등과 의논해 일본총독 및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이듬해 1월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동경행을 기회로 총살하려는 계획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안홍한(安弘翰)을 수행시켜 권총 4정과 실탄 수백발을, 그리고 대형 폭탄은 의열단에서 맡아 김한(金翰)으로부터 받기로 하고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상해를 떠나면서 농부차림으로 변장하고 밤을 틈타 압록강 철교를 건너면서 경비경관을 사살하였다. 신의주에 들어와서는 세관검문소 보초를 권총으로 머리를 때려눕히는 등 격투 끝에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서울에 와서 김한·서대순 등 동지들과 만나 조선총독을 총살하기 위한 치밀한 거사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상해 주재 일본경찰의 통보로 일제가 경계를 강화하자 조선총독 암살거사는 시일을 끌게 되었다.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 투탄으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다. 투탄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5일이 지난 1월 17일에 일본경찰은 투탄의 장본인을 알아내고 은신처를 추적하였다. 그러던 중 1월 17일 새벽 3시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高奉根)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三輪和三郎]에게 탐지되었다. 종로경찰서 우메다[梅田新太郎]·이마세[今瀨金太郎] 두 경부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다. 고봉근의 행랑방에 들어 있는 여자가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밀고하여 탄로난 것이다.

   은신처가 탄로나자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총격전을 벌였다. 먼저 종로경찰서 유도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田村振七]를 사살하였다.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추격하는 일본경찰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렀다. 여기서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산을 내려왔다. 18일은 무내미[水踰里] 이모집에서 유숙하고 19일 새벽 삼엄한 일본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李惠受)의 집에 은신하였다. 여기서 동상도 치료하면서 앞으로의 거사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 은신처마저 일본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상해로부터의 서신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해준 전우진(全宇鎭)이 일본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문초당한 끝에 은신처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 날 5시반경 경기도경찰부장 우마노[馬野]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藤本]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대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렸다. 기마대와 무장경관 수백명이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다.

   이번에도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쥐고 대총격전을 3시간 반 동안에 벌였다. 구리다경부를 비롯한 10여 명을 살상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탄환마저 다하여, 마지막 남은 탄환 한발을 가슴에 겨누고 벽에 기댄 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자결, 순국하였다. 그 때 효제동 총격전의 상황을 당시 중학생으로서 목격한 화가 구본웅(具本雄)은 그의 시화첩에서 감동적인 시와 당시의 광경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을 남기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념우표에는 상해에서 찍은 김상옥 의사의 유일한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초상화와 태극기 아래 종로경찰서에 투탄한 의거 장면을 담았습니다. 성공한 사업가의 삶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준 김상옥 의사의 삶을 우표와 함께 되새겨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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